흥선대원군과 암호화폐 이야기(1)-당백전과 청전

땡전 한 푼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던 말일 것입니다. 돈이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일 때 종종 읊조리곤 하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땡전’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신적은 계신가요?

땡전의 씨앗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해 섭정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물리치고 왕권강화의 뜻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려는 뜻을 강력하게 내비칩니다. 문제는 역사에서 대규모 건축공사가 늘 그랬듯,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초기에 이 문제를 원납전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원납전은 매관매직(조정에서 벼슬을 팔아 돈을 받는 행위)이나 포상을 통해 백성들의 기부를 반강제적으로 유도하는 기금이었습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옛모습

이를 통해 조정은 원납전 실시 첫 해에 500만 냥에 달하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표준화폐였던 상평통보의 유통총액이 대략 1000만 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액수가 모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초기 1년은 경복궁 중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공사작업에 동원되는 백성들에게 적당한 임금이 지급되고 작업강도 또한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열악하지 않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원납전의 성격이 비록 반강제적인 기부금이었으나 비교적 안정적으로 모인 자금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비자발적인 금모으기 운동이 나라의 위기에 쓰인 게 아니라 하나의 국가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이 2년차인 1866년으로 넘어가자 순조롭게 진행되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졌고, 대내적으로는 잘 진행되던 경복궁 중건 현장에 화재가 발생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작업했던 성과들이 상당부분 초기화되었으며 근처에 쌓아두었던 목재마저 잃게 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당백전의 발행을 수락하게 됩니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는 아뢰기를, ‘국용(國用)을 통제하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는 것은 천하고금의 상리(常理)입니다. 방금 변란을 겪고 공비(公費)가 날로 늘어 나라의 재정이 어렵고 백성들의 곤란하기가 지금 같은 때가 없는 만큼 마땅히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힘을 펴는 방책부터 강구해야 하지만 지금 경제가 궁핍하여 밤낮 근심스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당백전을 주조하자고 한 좌의정(左議政)의 계(啓)는 실로 옛일을 상고하고 오늘의 형편을 참작한 훌륭한 계책입니다. 다만 유포시켜 통행시키는 것은 비록 유사(有司)에 조처하는 책임이 있으나, 지출과 수입을 따지고 비용을 절약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제때에 크게 변통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역(易)》에서 이른바 재정을 다스리는 방책으로서 국용도 넉넉해지고 백성들의 재산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하문(下問)하여 재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판부사(判府事) 김병국(金炳國) 이하 사람들의 의견도 다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주조하는 문제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호조(戶曹)로 하여금 전적으로 맡아 거행하며 장소는 금위영(禁衛營)에서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1월 6일 신유 3번째 기사

정확히 1866년 11월 6일의 일이었죠. 그전에 유통되었던 상평통보가 사실상 한국 역사에서 화폐다운 화폐의 기능을 처음으로 유지했다면, 당백전은 한국 역사 최초의 통화정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문제는 건전하게 시행되었어야할 이 통화정책이 경제학적 지식이 전무한 상황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해당 화폐의 가치를 고려해 통화량을 세심하게 조절했어야하는데, 그저 찍어내서 유통만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죠.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 이상의 부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옵니다. 명목가치는 100배에 달했던데 비해 실질적인 생산원가는 다른 화폐의 5~6배에 불과했던 당백전은 곧장 조선경제에 타격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화폐단위부터가 백성들이 쓰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을 뿐더러, 당백전의 가치괴리를 다들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거래를 꺼리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당백전 거래는 전부 거부하고 상평통보 및 현물은 지키려는 현상으로 인해 시장에서 물물교환이 다시 성행했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로 말입니다.

또한 조정의 세금수취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한 뒤 지방수령들에게 세금을 당백전으로 걷을 것을 명했지만, 지방수령들은 백성들에게 상평통보나 현물을 수취해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걷은 세금은 자신들의 창고에 보관한 뒤, 그 세수(세금수입)만큼의 당백전을 조정에 납부했습니다. 악화(당백전)가 양화(상평통보, 현물)를 구축하는 사태가 그대로 실현됐던 것입니다.


사진 좌측이 당백전, 우측이 상평통보의 모습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조선조정은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의 차익에서 오는 시뇨리지(주조차익)효과를 채 반년도 보지 못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됩니다. 쌀값은 반년 만에 8배 가까이 폭등을 하였으며, 그 사이 1600만 냥에 달하는 당백전이 풀려 화폐의 가치가 바닥을 치게 됩니다. 앞서 말했던 상평통보의 유통총액이 1000만 냥이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임이 자명해보였습니다. 당백전이 땅돈이라 불리며 땡전 한 푼 없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상황을 수습하고자 2년 만에 1600만 냥 어치의 당백전을 전량 폐지하는 결정을 내리고 회수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기가 막힌 건 회수과정에서의 교환비가 1:1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당백전 1개를 들고 가면 조정에서는 상평통보 1개로 답례를 해주었습니다. 당백전을 들고 있었던 사람은 하루아침에 명목자산가치가 1/100로 떨어진 셈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백전을 없앤다고 해서 이미 유발된 고인플레이션이 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완충화폐 없이 상평통보가 풀리면 그동안의 거품이 한 번에 드러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조정에서 당백전의 대체화폐로 내놓은 것이 바로 상평통보의 1/3가치였던 청나라의 화폐 청전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달러를 국내의 민간시장에서 원화처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조치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청전마저도 상평통보에 비해 악화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조선경제의 혼란은 지속되었고, 악화가 계속해서 양화를 구축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상평통보의 가치는 계속 올라서 이를 쌓아두는 관료만 이득을 취하고 청전을 사용하는 일반백성들만 피해를 보게 되었던 것이죠.


오늘날 경복궁의 모습

결국 근본적으로 화폐경제를 되살리려면 양화를 제외한 악화를 폐지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청전은 경복궁 중건이 끝나고 얼마 뒤에 폐지되고 맙니다. 물론 결정에 따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조선후기의 세수가 60만 냥 정도에 달했는데 당백전만 1600만 냥이 풀렸으니, 이제는 그 차액만큼의 부담을 조정이 떠안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보려 해도 이미 시장경제가 파탄이 난 상황이라 제대로 세금수취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병사들에게 쌀조차 제때 지급을 못하는 바람에 결국 임오군란과 같은 사건이 터지고 말았던 것이죠.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에는 임오군란이 매우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그 경제적 배경에는 이처럼 복잡한 과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임오군란이 한국근대사에서 조선멸망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현대판 당백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짐바브웨의 화폐 짐바브웨 달러입니다.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당백전 사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그 물가상승률이 당백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았습니다. 2008년 여름경에는 상승률이 1000억%에 다다를 정도로 말입니다. 이후 2008년 겨울쯤에는 억이나 조 단위를 넘어 상승률이 경, 해에 이를 지경이라 정확한 계산이 나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치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짐바브웨의 경제적 후유증이 어떻게 남아있을지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지경이겠죠.

이밖에도 국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나라가 많습니다. 부정부패와 경제정책 남용으로 화폐질서가 무너진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그렇습니다. 심지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선진국에서조차 현대 금융자본주의가 가지는 근본적 문제점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양적완화를 해도 돈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구성원 대다수의 실질소득이 오히려 감소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국면에서 암호화폐의 등장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카모토 사토시가 2008년 금융위기의 1달 뒤쯤 비트코인 백서를 처음 공개한 이래로, 비트코인이 중앙화폐의 부작용이 생긴 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처럼 말입니다. 중앙화폐가 무너진 짐바브웨나 베네수엘라에서 비트코인이 유행하는 이유도 이와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암호화폐는 중앙이 관리하기 때문에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여러 문제들에 경종을 울려주는 기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입니다. 그 미래가 중앙과 결합하는 구조로 갈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암호화폐 고유의 특징이 살아있는 한 중앙시스템도 기존의 전략을 그대로 고수할 수만은 없겠죠. 흘러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세계경제가 조선말기의 당백전처럼 잘못된 유인책을 선택하지 않기를 기대해봅니다.

PS. 흥선대원군과 암호화폐 이야기 2부는 경제사가 아닌 정치사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쇄국정책의 오해와 진실을 오늘날과 빗대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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